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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극우 팔레스타인·중동 이재명 정부 이주민·난민 우크라이나 전쟁 긴 글

다시 떠오른 ‘두 국가 해법’ — 팔레스타인인들을 위한 진전인가?

다음은 8월 14일에 열린 노동자연대 서울 공개 토론회에서 필자가 발제한 내용을 다듬고 보완한 것이다.

“요르단강에서 지중해까지” 팔레스타인 해방 두 국가 지지 구호가 아니다 ⓒ조승진

끝을 모르는 이스라엘의 인종 학살과 만행은 서방 정부들을 갈수록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인종 학살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가 깊어지고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는 국제 운동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지난달 말 주요 유럽 강대국인 프랑스와 영국이 유엔 총회가 열리는 다음 달 팔레스타인 국가를 인정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후 프랑스는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뉴욕 유엔 본부에서 160개국과 고위급 회의를 열어 ‘두 국가 해법’ 실현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작성했다. 그리고 9월 초 유엔 총회가 열리기 전까지 이 ‘뉴욕 선언’을 지지해 달라고 모든 유엔 회원국에 요청했다.

이재명 정부도 이런 흐름에 힘을 싣고 있다. 앞서 언급한 유엔 고위급 회의에도 참석했고, 8월 10일 네타냐후의 가자시티 점령 계획에 우려를 표하며 두 국가 해법에 대한 지지를 재천명하는 외교부 논평을 냈다.

그런데 이런 흐름에 관해 먼저 지적할 점은 프랑스와 영국이든 이재명 정부든 무기 수출 중단이나 단교 등 이스라엘을 실질적으로 압박하겠다고 약속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물론 최근 독일은 네타냐후 정부가 가자시티 점령 계획을 승인하자 이스라엘로의 무기 수출을 일부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런 발표가 이례적이기는 해도 독일의 무기 수출 중단은 지극히 제한적일 것이다. 독일 총리 메르츠는 “이스라엘의 자기 방어에 핵심적인 방공과 해상 방위 장비”에는 그 조처가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스라엘산 무기 수입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위선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에 기대를 표하는 사람들이 있다.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은 마땅히 이뤄져야 할 일이고 팔레스타인인들을 위한 ‘국제 사회’의 노력의 첫 걸음이 될 것이라는 기대일 것이다.

8월 12일 권영국 정의당 대표는 “대한민국 정부도 이러한[팔레스타인 국가 인정] 흐름에 즉각 동참해야” 하고 “이스라엘의 학살이 지속된다면 ⋯ 단교를 비롯한 외교적 조치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민중의 소리〉도 ‘국제 사회’가 트럼프와 네타냐후에게 제동을 걸어야 하고 “우리 정부 역시 ⋯ 팔레스타인을 독립 국가로 인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다수의 국가가 ‘뉴욕 선언’을 지지한다고 해도 그것은 실질적 의의를 갖기 어렵다는 관측이 이미 많다.

게다가 전보다 더 많은 주요 유럽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이로운 진전일까?

두 국가 해법으로 가는 길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은 당연히 환영할 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거론되는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은 “두 국가 해법”에 힘을 실으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두 국가 해법”이 무엇인지를 살펴봐야 한다. 두 국가 해법은 이스라엘과 나란히 공존하는 팔레스타인 국가를 수립해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자는 제안이다.

이스라엘 건국 이념이자 운동인 시온주의는 중동에 제국주의의 전초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원주민의 땅을 빼앗는 정착자 식민주의 프로젝트였다. 역사적 팔레스타인을 유대인 정착자들의 국가와 아랍인들의 국가로 분할하자는 제안들은 이미 이스라엘 건국 이전부터 여러 차례 나왔으나, 시온주의자들은 그 모든 제안을 무시하고 1948년 ‘나크바’를 일으켜 이스라엘을 건국하고 팔레스타인 땅의 80퍼센트를 차지했다.

두 국가 해법의 더 구체적 제안은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에 있다. 그 전쟁은 1950~60년대에 이집트, 이라크 등지에서 식민 지배를 끝낸 아랍 민족주의 물결의 패배를 나타내는 전쟁이었다. 그 전쟁의 승자인 이스라엘은 역사적 팔레스타인의 나머지 20퍼센트마저 점령했다. 당시 유엔 안보리는 이스라엘이 점령한 그 20퍼센트, 즉 서안지구, 가자지구, 동예루살렘에서 철군하라고 요구했다. 이 경계가 이후 두 국가 해법의 기준이 된다.

이는 기본적으로 두 국가 해법이 정의로울 수 없음을 보여 준다. 난민까지 포함하면 수적으로 유대인 정착자보다 훨씬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팔레스타인 땅의 20퍼센트만을 가지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당시 유엔 안보리는 팔레스타인 주권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 전까지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은 요르단이, 가자지구는 이집트가 통제하고 있었고, 유엔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난민 문제 정도로 취급했다.

당연히 팔레스타인 민족 해방 운동은 유엔의 방안을 거부했다. 당시 그 운동을 이끈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1960년대 말 당시에 추구한 비전은 팔레스타인 전체를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1969년 PLO의 의사 결정 기구인 팔레스타인민족회의(PNC)는 해방된 팔레스타인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무슬림, 그리스도인,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을 포괄하는 자유로운 민주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에 PLO는 비종교적 단일 민주 국가라는 이러한 목표에서 후퇴했다. 이것은 당시 PLO가 겪은 일련의 패배에서 비롯했다 그 패배를 이해하려면 오늘날까지도 팔레스타인 민족 해방 운동을 관통하는 역설을 알아야 한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중동 전체의 문제이고, 그곳 대중 전체를 움직일 잠재력이 있다. PLO를 이끈 파타는 다른 아랍 나라에서 일어나는 팔레스타인 지지 운동이 그 나라 정권에 도전하는 운동으로 발전하는 것을 한사코 피하려 했다. 파타의 전략은 게릴라전을 펴면서 주변 아랍 국가들의 협력을 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파타가 보기에 그 국가들은 미래 팔레스타인 국가의 잠재적 파트너였다. 그래서 그들의 안정을 뒤흔들 일은 한사코 피했다.

1967년 전쟁으로 아랍 민족주의 운동들이 패배했을 때 PLO는 이스라엘을 상대로 한 게릴라 전에서 상징적 승리를 거둬 전성기를 누렸다. PLO는 특히 요르단에서 거대한 세력을 이뤘고, 그들이 누린 지지와 권위는 미국과 이스라엘에 협조하며 지극히 억압적인 요르단 정권을 위협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PLO가 요르단 정권과의 대결을 회피하는 바람에 요르단 국왕은 PLO를 선제 공격하고 해외로 쫓아낼 수 있었다. 이것이 이른바 1970년 ‘검은 9월’ 사건이다. 이후 PLO는 레바논에서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파타가 의존하려 한 아랍 국가들이 잇따른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패배하면서, 파타 지도자들은 미국·이스라엘과의 협상으로 팔레스타인의 일부를 얻어내 ‘소국가’를 세우는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는 아랍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제국주의에 맞서지 않고 제국주의와 협력하는 노선으로 전환한 것과 맞닿아 있었다. 가령 1978년 이집트가 미국·이스라엘에 굴복하면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체결하는 협상에서는 가자지구, 서안지구(동예루살렘은 포함 안 됨)에 팔레스타인 자치 당국을 수립한다는 계획이 포함돼 있었다. PLO는 이런 협상으로 뭔가를 얻어내려 했던 것이다.

PLO가 비종교적 단일 민주 국가라는 목표를 공식 폐기한 것은 1988년이었다. 하지만, 그 후퇴의 여정은 1974년부터 시작됐다. 처음에 ‘소국가’ 노선은 팔레스타인 전체의 해방을 위한 준비 단계로서 제시됐다. 그러나 갈수록 PLO는 대중 운동을 건설하기보다는 중동 외교의 한 참가자가 되는 데 집중했다. 그러면서 ‘소국가’가 목표가 됐다.

요컨대 팔레스타인 민족 해방 운동의 맥락에서 두 국가 해법은 운동의 최종 목표를 포기하고 미국·이스라엘과 협상하는 노선으로의 전환을 뜻했다.

시온주의를 구제하기 위해 제안되다

이스라엘과 서방에게 두 국가 해법은 시온주의 프로젝트를 위기에서 구해 내기 위한 방편이었다. 시온주의 프로젝트의 모순은 더 많은 땅을 차지할수록, 자신이 원하지 않는 팔레스타인인들도 그 땅과 함께 딸려 왔다는 것이다. 특히, 1967년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나머지 팔레스타인 땅을 모두 차지했을 때 팔레스타인인들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때와 달리 살던 곳을 떠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그 팔레스타인인들을 동등한 국민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과 상시적 전쟁 상태를 불렀다. 이는 ‘중동 유일의 민주주의 국가’라는 이스라엘의 이데올기적 정당성에도 지장을 줬다.

1970-80년대에 PLO를 패배시키면서 이스라엘은 저항을 어느 정도 제압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87년 인티파다는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보여 줬다. 인티파다 자체는 이스라엘에 결정적 타격을 가할 수 없었지만, 이스라엘은 그것을 진압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그 항쟁은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의 중동 지배 질서를 흔들 잠재력을 보였다. 인티파다는 여러 중동 나라들에서 연대 시위를 촉발했고, 특히 이집트에서는 그것이 혁명적 반독재 투쟁과 결합되는 양상을 보였다.

냉전에서 막 승리한 미국이 중동 질서를 재편하는 데 이런 상황은 부담이 됐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아랍 우방들의 관계를 관리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항쟁을 적절히 제어할 세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PLO가 바로 그런 세력이었다. PLO는 자신이 추구하는 ‘소국가’를 얻어낼 수 있다면 무엇이든 양보할 태세가 돼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1993년 오슬로 협정이 체결됐다.

두 국가 해법을 지향한 오슬로 협정(1993)은 시온주의의 위기와 PLO의 후퇴가 만난 결과였다 ⓒ출처 미국 정부

오슬로 협정: 두 국가 해법이 애당초 실현 불가능함을 보여 주다

오슬로 협정과 그 이후의 ‘평화 프로세스’는 두 국가 해법이 구체적 현실에서 뜻하는 바를 보여 줬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점은 오슬로 협정이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을 둘러싼 협정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러한 협상을 위한 협상이었다.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립과 그 국가의 국경, 난민 귀환 같은 핵심 쟁점들은 ‘평화 프로세스’에 따른 최종 협상에서 결정될 문제로 미뤄졌다.

이스라엘은 그 프로세스에서 규정된 시한을 번번이 미루고, 그러는 동안 팔레스타인 지배를 ‘기정사실화’해 최종 협상을 할 즈음이면 그다지 협상할 것이 남아 있지 않게 하려 했다. 애초부터 팔레스타인 측에 제대로 된 국가를 허용해 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오슬로 협정을 통해 수립된 PA(‘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라고 흔히 번역되지만 더 정확히는 그저 ‘팔레스타인 당국’)은 결코 국가가 아닌 그것의 미니어처에 불과했다.

1967년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정착촌을 건설해 그 지역을 먹어 들어갔다. 이 정착촌 건설이 오슬로 협정 이후 이스라엘의 지배를 기정사실화하는 핵심 수단이 됐다. 정착촌 일대와 그곳들을 잇는 도로도 이스라엘이 통제했다. 이스라엘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의 상공도 통제했다. PA 수반 아라파트는 헬기를 타고 이동할 때마다 이스라엘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PA는 독자적 군대를 둘 수 없었고 오로지 내부 치안을 위한 경찰만을 둘 수 있었다.

파타 지도자들은 이스라엘과 협상하는 위치에서 오는 특권을 이용해 부를 쌓을 수 있었다. 반면 대다수 팔레스타인인의 삶은 오슬로 협정 체결 이후 오히려 악화됐다. 이에 대한 반발로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이 벌어지면 이를 진압하는 것도 PA의 몫이었다.

결국 시한이 한참 지난 2000년이 돼서야 최종 지위 협상에 해당하는 회담이 열렸을 때 이스라엘은 굴복자 아라파트조차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안을 내밀었다. 정착촌 건설 지역을 이스라엘로 넘기고, 서안지구의 또 다른 일부 지역을 길게는 20년 동안 이스라엘의 군사 지역으로 남겨 두는 등의 안이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됐다.

이후에도 이 ‘평화 프로세스’를 되살린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진전은 없었고, 그러는 사이 이스라엘은 자신의 지배를 강화해 왔다.

이스라엘이 정착촌을 포기하지 않고, 팔레스타인 측에 진정한 국가를 허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착촌이 강탈된 땅 위에 지어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에도 의문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두 국가 해법’에 기대를 걸었던 팔레스타인인들은 그것을 최종 목적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한 단계로 여겼다. 두 국가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교류가 활발해지고 난민들이 돌아오다 보면, 결국에는 정착자들도 팔레스타인인과 뒤섞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런 발판을 허용해 줄 생각이 없었다.

결국 현실에서 두 국가 해법은 팔레스타인 지도부를 포섭해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통제하는 일을 맡기는 것을 뜻했다.

이런 점은 2006년 PA 선거가 열렸을 때 다시금 입증됐다. 그 선거에서 하마스가 승리하자 이스라엘과 서방은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고 파타의 쿠데타를 지원했다.

당시 하마스는 “이스라엘 국가 구조의 파괴”라는 초기 강령을 희석시키고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를 일단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과 서방이 하마스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하마스가 저항을 포기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오슬로 협정의 경험은 두 국가 방안이 이스라엘 국가의 성격 때문에 애당초 실행 불가능함을 보여 준다.

애당초 실행 불가능하기에 때문에 두 국가 방안은 많은 정부들이 팔레스타인을 위해 뭔가를 하는 것처럼 둘러대는 편리한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아랍 정권들은 PA에 알량한 지원을 제공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하는 것처럼 둘러댈 수 있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이 벌어지고 이스라엘이 짓밟으면, 아랍 정권들은 거기에 우려를 표하며 두 국가 방안의 실현을 촉구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인들을 편드는 것처럼 행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최근 일부 서방 국가들의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 움직임은 어떤 것인가? 그 움직임의 중요한 일부는 영국 정부가 제출한 계획이다. 그 계획은 가자지구를 하마스가 아닌 PA와 연계된 전문 관료들의 위원회가 통치하고, 이스라엘이 철군하는 대신 다국적 평화 유지군이 주둔하고, 미국이 휴전을 감시한다는 것이다. 하마스는 무기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서방에 저항할 의지와 능력이 없는 기구를 팔레스타인 ‘국가’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유럽 국가들이 운을 띄우자 아랍 정권들도 여기에 호응하며 이를 면피 수단으로 삼고 있다. 앞서 말한 내용을 담은 ‘뉴욕 선언’을 아랍연맹 회원국 전원이 지지한 것이다. 그러면서, 하마스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압력을 가하고 있다.

오슬로 협정에 따른 ‘평화 프로세스’도 이전부터 계속돼 온 강탈 과정의 연속이었다

두 국가 해법 재점화는 이스라엘에게 퇴로를 마련해 주는 것

물론 미국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이를 두고 대부분의 언론들은 유럽 국가들과 미국·이스라엘 사이의 갈등에 초점을 맞춘다.

이들이 불협화음을 빚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나날이 이어지는 인종 학살 전쟁으로 시온주의의 이데올로기 위기가 더 심각해지는 것을 반영한다. 동시에,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그 위기를 키우고 있는 네타냐후와 트럼프를 서방 지도자들이 견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본질적으로, 유럽 국가들의 움직임은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에 퇴로를 제공해 주는 것임을 봐야 한다.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을 두고 이스라엘과 미국의 고립이 두드러지는 것에 비춰 보면 “퇴로를 열어 준다”는 것이 언뜻 와닿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스라엘의 정착자 식민주의 프로젝트가 첨예한 위기에 빠져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현재 그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 것은 노골적으로 인종 청소를 추구하는 이스라엘 극우다. 이스라엘 정치의 극우화는 일탈이 아니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시온주의 프로젝트의 모순에서 비롯한다. 더 많은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할수록 그 땅에 사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에 직면하는 것이다.

그 모순 속에서 이스라엘은 아파르트헤이트(인종 분리)와 제노사이드(인종 학살) 사이에서 갈팡질팡 해 왔다. 두 국가 해법을 지지한다는 이른바 자유주의적 시온주의자들은 바로 전자를 대표하는 세력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억누르는 데 거듭 실패하면서 인종 학살을 노골적으로 추구하는 극우가 이스라엘 정치에서 갈수록 득세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극우도 시온주의의 모순을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다. 네타냐후는 가자지구 대부분을 파괴하고 통제하고 있지만, 하마스를 궤멸시키거나 가자 주민을 모조리 내쫓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네타냐후 정부가 가자시티 점령 계획을 바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런 어려움을 반영한다.

이런 모순과 난관 때문에 이스라엘 국가는 첨예한 분열에 시달리고 있다. 8월 초 이스라엘의 군사·정보 기구 수장들은 이스라엘이 패배의 벼랑 끝에 서 있다고 선언했다. 군사적 패배에 직면했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정치적 정당성의 위기가 매우 심각하다고 우려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노골적으로 인종 학살 전쟁을 수행하며 “인권”을 존중하는 척조차 하지 않고 있다.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이 “민주주의”라는 환상은 깨지고 있다.

서방 국가들도 정당성의 위기를 겪고 있다. 무슬림을 테러리스트로 몰고, 이스라엘의 인종 학살에 항의해 온 사람들을 유대인 혐오로 몰아 온 것이 위선이었음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스라엘 국가와 시온주의의 정치적 정당성이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재점화된 두 국가 해법은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것이기에 굉장히 문제적인 것이다. 또, 그것은 이스라엘을 지원해 온 서방이 도덕적·이데올로기적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인 것이다.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윤석열과 차이가 없는 이재명 정부

이재명 정부도 서방 정부들의 흐름에 편승하고 있다. 이것은 윤석열 정부가 하던 일과 별로 다르지 않다. 지난해 2월 윤석열 정부도 이스라엘이 라파흐에서 군사 작전을 개시할 때 비슷한 우려를 표한 바 있다. 윤석열 정부와 이재명 정부 모두 이스라엘이 하는 일을 인종 학살(제노사이드)로 부르지 않고 그저 ‘인도적 위기’에 우려를 표했다.

이스라엘과의 교류 관계, 경제적 관계 등에 손상을 줄까 봐 아주 추상적이고 모호한 용어를 써서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해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재명 정부가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단절하라고 촉구하는 바이다.

권영국 정의당 대표가 이스라엘이 벌이는 일을 “학살”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나마 낫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학살을 지속한다면 단교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한 것은 현 상황의 심각성과 첨예한 위기에 걸맞지 않다. 얼마나 더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죽어야 “단교를 검토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금 당장 단교를 요구해야 하고, 이스라엘 대사관 폐쇄와 대이스라엘 무기 수출 중단을 촉구해야 한다. 국가 인정이라는 신기루를 인정할 게 아니라 말이다.

최근 유럽 국가들이 주도하는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 흐름은 서방과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심각한 이데올로기 위기와 제국주의 내부 분열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런 위기와 분열에서 환상을 보아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이라는 신기루를 좇을 것이 아니라, 저들의 위기와 분열을 심화시키고 시온주의를 더욱 고립시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스라엘 국가의 정당성 문제가 전례 없이 문제되고 있다. 영국의 팔레스타인 연대 시위 ⓒ출처 가이 스몰만

토론 정리

처음 발언한 팔레스타인인이 두 국가 방안에 헛되이 매달리는 사람들의 특징 하나를 얘기했다. 그들은 그것이 불가능하고 실질적이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그 안에서 희망을 찾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팔레스타인인들은 또 한 번 신기루에 낭비할 시간이 없다고 지적했다.

최근에 두 국가 방안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에는, 브릭스나 중국, 러시아 등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국가가 부상하는 상황이 그 방안에 힘을 실어 줄 거라고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브릭스 국가들의 진정한 관심사는 팔레스타인의 해방에 있지 않다. 그들은 국가 간 경쟁 체제 속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 팔레스타인 문제를 이용하려 할 뿐이다. 가령 중국도 “제노사이드(인종 학살)”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중국은 2023년 10월 7일 개전 후에도 이스라엘과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이스라엘이 가장 많은 상품을 수입하는 나라가 중국이다. 게다가 기술 부문 등 중요한 부문의 무역들이 굉장히 많이 이뤄지고 있다.

중국은 그저 상황이 안정되기를 원할 뿐 팔레스타인들의 해방을 진정으로 바라는 게 아니다.

이런 국가들의 움직임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제국주의에 맞서는 평범한 사람들의 투쟁이 진정한 동력이다.

해방된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인들이 어떤 지위를 가질 것이냐는 질문이 있었다. 발제에서 소개한 팔레스타인 민족 해방 운동의 애초 목표, “무슬림이든 유대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누구든 동등한 권리를 누린다”는 공식이 적용될 것이다. 그들도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구성원으로 남는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으면 사실 그곳을 떠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청중석의 한 분이 말했듯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그런데 몇몇 발언자가 지적했듯이 이스라엘 사회의 예외적 성격을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은 모든 것이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강탈을 중심으로 조직된 식민 정착자 사회다. 산업이 군사·하이테크 부문 중심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산업과 사회 조직 등 사회의 모든 측면이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강탈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리라고 기대하기가 어렵다. 베첼렘 등 시온주의에 비판적인 NGO들이 있긴 하지만 그런 곳은 매우 극소수에 불과하다.

매스 미디어에서 흔히 이스라엘에서 전쟁 반대 시위 일어난다고 보도하면서 조명하는 세력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시온주의자들은 현재 가자 전쟁의 우선순위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분열하고 있다. 인질 구출을 우선할 것인지, 하마스 궤멸을 우선할 것인지 등. 이스라엘의 ‘전쟁 반대 시위’라는 것은 이런 우선 순위를 둘러싼 갈등과 분열의 표현일 뿐, 그 시위를 주도하는 세력도 팔레스타인인 억압·지배라는 목표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잘 알아야 한다.

팔레스타인에 비종교적 단일 민주 국가를 건설하려면 식민주의 프로젝트로 건설된 이스라엘 국가를 강제로 해체해야 하고, 그것이 가능하려면 아랍 노동 계급 대중의 투쟁이 팔레스타인들의 투쟁과 만나야 한다.

역사를 보면 실제로 그런 가능성을 보여 준 사례들이 있다. 발제에서 언급한 1970년 요르단이 그런 사례였고, 2011년 아랍 혁명도 바로 그런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집트에서 2000년의 제2차 인티파다를 보며 급진화한 사람들은 이후 2011년 이집트 혁명을 이끄는 주역이 돼, 가자지구를 봉쇄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하는 이집트 정권을 무너뜨렸다. 물론 아랍 혁명은 이후에 좌절을 겪었지만, 우리는 아랍 혁명이 획기적 전망을 여는 사건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현재 이스라엘과 서방이 심각한 정당성 위기를 겪고 있다고 다시금 강조하고자 한다. 특히, 서방 국가들의 움직임은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가지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고, 그만큼 이스라엘의 더한층 고립화 요구들이 더 많은 울림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팔레스타인들의 해방을 바라는 우리는 이런 기회를 놓치지 말고 연대 운동을 키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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