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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의 평화주의]:
하마스와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도 말려야 할까?

11월 25일 이스라엘의 인질 석방에 환호하며 하마스 깃발을 흔드는 서안지구 라말라 주민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저항 세력 사이에서 일시 교전 중지가 합의되고 교전 중지 연장 가능성이 거론되는 가운데, 평화 운동 일각에서는 평화 협상과 ‘국제 사회’의 합의를 통한 해결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참여연대는 11월 24일 더불어민주당 김상희 의원과 정의당 배진교 의원이 방한한 왈리드 시암 주일 팔레스타인 대사를 만나 연대를 표명한 것을 알리는 보도자료를 냈다. 참여연대는 그 자리에 배석하기도 했다. 참여연대가 민주당에 기대어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루려 한다는 점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참여연대는 2000년대 초 이라크 전쟁 파병 반대 운동 때도 여당인 열린우리당에 의존했지만 열린우리당은 파병안 찬성 당론을 채택했고 파병에 끝까지 반대한 그 당의 의원들은 소수였다.) 시암 대사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두 국가 방안만이 사태를 정리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그동안 참여연대가 강조해 온 바와도 맞닿는 면이 있다. 10월 7일 팔레스타인 저항 세력들의 기습 공격 후 처음 발표한 성명서에서 참여연대는 “양측은 모두 군사 행동을 즉각 중단하고 평화적이고 정치적인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 성명서에서 참여연대는 하마스의 공격을 규탄하고 이스라엘의 지상군 투입에도 반대했다.

참여연대의 입장을 순수한 양비론이라고 볼 수는 없다. 더 큰 폭력의 책임과 더 근본적 문제가 이스라엘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비론에 타협할 여지가 있는 입장이다. 실천에서 참여연대는 언제나 이스라엘과 하마스 둘 모두를 향해 휴전을 촉구해 왔다.

현재 가자지구의 참상을 보며 평화를 염원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전쟁을 끝낼 생각이 없다. 더구나 팔레스타인 저항 세력이 계속 싸우고자 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를 지지해야 한다.

11월 26일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한국 시민사회 긴급행동’의 집회에서 연설한 팔레스타인인 마리암 이브라힘 씨가 지적했듯이, “휴전은 이스라엘에게 현상 유지를 뜻할 뿐이고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현상 유지란 억압과 폭력, 살해, 완전한 권리의 박탈을 뜻할 뿐”이다.

정의 없는 평화를 지지할 수는 없다.

현재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끔찍한 죽음과 파괴를 몰고 왔지만, 전쟁 전에도 팔레스타인인들의 상황은 이미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는 이미 2012년에 낸 보고서에서 2020년이 되면 가자지구는 이스라엘의 봉쇄로 인해 거의 살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게다가 지금은, 그 보고서가 감안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의 폭격과 팬데믹이 가자지구 주민들의 삶을 더욱 악화시켰다.

한편, 2018년 가자 국경 지대에서 벌어진 ‘귀환 대행진’ 시위와 2021년 역사적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일어난 대중 항쟁 등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은 번번이 이스라엘의 잔혹한 탄압과 살상에 직면했고 돌파구를 열지 못했다.

이스라엘 내에서는 노골적으로 인종 청소를 주장하는 세력이 갈수록 득세했다. 주변 아랍 정권들은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구하며 팔레스타인 문제를 아예 없는 셈 취급하다시피 했다.

돌이켜 보면, 이런 상황에서 10월 7일 하마스의 공격은 필연에 가까웠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저항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 공격은 이스라엘에 일격을 가했다. 이스라엘 국가의 난공불락 위세에 흠집을 내고, 팔레스타인인과 중동 피억압 대중에게 이스라엘에 맞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줬다. 이스라엘과 아랍 정권들의 수교 노력에 제동을 걸어 미국의 중동 정책에 차질을 줬다.

특히, 하마스의 공격은 유례없는 규모의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을 촉발했다. 운동에 참가한 모든 사람이 그 공격을 지지하며 거리로 나선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현재 국제적 연대 운동의 기세는 현지 저항 덕분이다. 한국에서의 팔레스타인 연대 집회에 참가하는 아랍인들의 정서를 보아도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복수심으로 그득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어마어마한 죽음과 파괴, 참상을 안겨 주고 있다. 참여연대가 규탄하는, 하마스의 공격에 의한 민간인 희생도 이 비극의 작은 일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비극에도 불구하고 10월 7일 공격의 역사적 의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 보지 않는 것은 어쩌면 그런 비극의 원천을 끝낼 수도 있는 잠재적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참여연대가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공격 모두를 규탄하는 것은 한 치의 무고한 희생과 비극 없이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할 길을 찾기 위한 것일 테다. 특히, “당사자와 국제 사회가 협력”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그런 길이라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두 국가 방안’의 실패는 그런 접근법의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 줬다. ‘국제 사회’가 인정한 ‘평화 프로세스’ 하에서 두루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점령을 지속하고 유대인 정착촌을 확대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여기에 맞선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단속하는 구실을 자임했다. 유대인 정착촌 건설의 불법성을 지적하는 숱한 ‘국제 사회’의 결의에도 이스라엘은 제재를 거의 받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팔레스타인인들의 고통은 더 커져만 갔다.

이런 실패는 우연이 아니다. 참여연대도 자신들이 개최한 여러 강연과 발표한 글들에서 지적했듯이 강탈과 점령, 배타성은 시온주의 프로젝트의 본질과 직결돼 있다.

그럼에도 참여연대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화를 모색하는 것은 이미 건국된 지 75년이나 된 이스라엘을 어찌할 수 있겠느냐는 (근시안적) 현실주의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평화 공존은 오직 이스라엘 국가가 해체되고 민주적 세속 국가로 대체될 때만 가능하다.

그런데 그 75년의 이스라엘 역사는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었고(특히 2011~13년 아랍 혁명을 떠올려야 한다), 지금도 만만찮은 저항에 직면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도 자신의 패권을 유지하는 데 갈수록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제 사회의 협력”이 해법이 되기 어려운 것은 팔레스타인 문제가 제국주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서방 제국주의의 경비견 구실을 함으로써 서방 제국주의의 지원 속에 건국되고 유지돼 왔다. ‘국제 사회’가 어떤 합의를 이루든 이에 개의치 않고 미국은 중동 지배력을 유지하는 데서 핵심적 구실을 하는 이스라엘을 지키려 할 것이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해방의 대의를 전진시키려면, 팔레스타인 현지의 저항(인티파다와 무장 투쟁 모두)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 저항에 대한 국제적 연대가 결합돼 제국주의 질서를 뒤흔들어야 한다. 특히, 주변 아랍 나라들에서의 연대가 자국 독재 정권들에 맞선 저항으로 표현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의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의 방향도 여기에 일조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하마스 등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을 마땅히 지지해야 한다. 비판은 건설적이고 동지적이고 반제국주의적이어야 하지, 감상적 인도주의의 발로여서는 곤란하다. “인도주의”를 내세우는 미국 권력자들의 위선에 포괄될 위험이 있다.

⁠2000년대 초 이라크 전쟁 파병에 반대한 열린우리당 의원의 수에 대한 잘못된 사실 관계 서술을 2024년 11월 12일에 바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