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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권 위기’의 대안은 무엇인가?

‘교권 침해’에 분노해 투쟁에 나선 교사들 7월 29일 서울정부청사 앞에서 열린 ‘공교육 정상화를 위한 집회’ ⓒ조승진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을 계기로 ‘교권 침해·보호’ 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했다. 현장 교사들은 교사의 교육권 보장을 위해, 학생의 학습권 보장과 안전한 교육환경 조성을 위해 ‘교권 보호’ 대책을 요구하고 나섰다. 정부와 교육 당국에서도 부랴부랴 ‘교권 보호’ 대책을 내놨다. 한편 진보좌파 일각에서는 ‘교권’은 진보적 의제가 될 수 없다며 교사 운동에 거리를 두고 있다.

저마다 얘기하는 교권은 과연 같은 것일까? 서로 다르다면, 교권은 대체 무엇이어야 할까? 요즘 ‘교권 보호’ 문제로 사회적 논의가 한창인 이때, 교권 개념의 모호성 또는 다의성이 운동 참가자뿐 아니라 이 운동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도 혼란을 준다. 이 글은 ‘교권’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교권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지, 나아가서 위기에 처한 교사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얘기해 보고자 한다.

교권이란 무엇인가?

교권을 어떻게 개념화하는가는 교권 침해의 원인을 밝히고 대안을 모색하는 작업의 중요한 출발점이다. 사실 교권의 개념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법령 어디에도 정확하게 교권을 규정해 놓지 않았다. 무릇 사회적 용어가 그렇듯, 교권 역시 시대와 사회적 상황에 따라, 또 어떤 집단이 사용하느냐에 따라 개념이 변해 왔다.

학계 등에서 논의된 교권(敎權) 개념에 대한 견해를 종합해 보면 교권은 다음 네 가지를 포함한다. 첫째, 노동기본권과 정치기본권. 둘째, 교육의 주체로서 학교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셋째, 교육과정과 수업, 평가 등 일련의 교육적 과정에 대해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아니하고 자율적이고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권리. 넷째, 수업과 생활지도 등 교사가 교육활동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행사하는 권한.(이 외에도 교원의 재산상, 신분상의 권리 등도 포함되지만, 이 글의 주제에서 벗어나므로 여기서 다루지는 않겠다.)

위에 언급한 네 가지 권리나 권한은 서로 구분은 할 수 있으나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교권의 구성 요소다. 그런데 교권 문제가 화두가 된 요즘, 교권은 넷째 요소만 가리키는 매우 협소한 의미로 통용된다. 다시 말해, 교권은 교사가 교육활동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직무상 권한을 뜻한다. 이런 맥락에서 교권은 흔히 ‘수업권’이나 ‘생활지도권’으로 치환된다. 왜 그럴까?

정부는 교권을 일관되게 직무상 권한으로 한정해 왔다. 교육 당국은 ‘교권’ 침해나 보호라는 용어보다는 ‘교육활동’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윤석열 정부는 교권 침해 대책으로 지난해 12월 ‘교육활동 침해예방 및 대응강화 방안’을 내놨다. 제목에서 보듯이, 이 방안의 목적은 교사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활동’ 즉 수업을 보호하는 것이다. 또한 이 방안에서는 교육활동 침해 주체를 학생과 보호자(학부모)로 한정했다. 교육 당국에 의한 부당한 간섭, 지시, 명령은 교권 침해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는 교육활동(수업과 생활지도)의 범위를 넘어서 교사의 권리를 보장해 줄 의사가 없다. 교사들은 노동자로서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받고 있지 못하다. 다른 노동자들과 달리 파업권이 없고, 초과근무수당이나 퇴직수당 등에서도 다른 정규직 노동자들에 비해 상당한 차별을 받는다. 정당 가입은커녕 선거 공약에 대한 의견조차 표현할 수 없고, 모든 공직 선거에 입후보할 수도 없다. 교사들은 노동자로서도 시민으로서도 권리를 부정당해 온 셈이다.

한편, 학교의 모든 의사결정은 여전히 교장이 독점하고 있고, 평범한 교사들은 학교 운영에서 소외돼 있다. 교육 당국이나 교장으로부터 무시당하고 부당한 간섭이나 명령을 받기 일쑤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한다면 교권 추락은 결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애초에 추락할 교권조차 없었으니까 말이다.

정부가 교사들의 권리를 철저하게 부정해 온 탓에, 현장 교사들은 교권으로서 유일하게 수업권 정도만 경험할 수 있었다. 국가로부터는 노동기본권과 정치기본권을, 교육 당국으로부터는 교육과정과 평가의 자율권을, 관리자로부터는 학교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정당했지만, 권위주의 시대에(그 후로도 한동안) 교사들은 체벌 등을 통해 학생들을 억압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행사했다. 꼭 체벌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처벌이나 훈계 등으로 수업과 생활지도에서 학생 통제가 그럭저럭 가능하다고 느꼈다. 교사들의 사회적 지위가 인정되던 때에는 나름의 전통적인 권위를 인정받기도 했다. 교권에 대한 고정관념, 즉 교사가 학생을 통제·억압하는 권한으로서의 부정적 이미지는 정부가 교사의 기본권을 억압하면서 동시에 교사를 통해 학생의 인권을 억압하던 권위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물론 정부가 이러한 교권 개념을 강요한다고 해서 교사나 일반 대중이 그것을 무조건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왜 협소한 교권 개념이 지배적으로 됐는지를 이해하려면, 교권을 둘러싼 사회적 투쟁이라는 맥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60년 4·19 혁명의 여파 속에서 최초의 교원노조가 탄생했다. 당시에 노조는 학원의 자유, 교육행정의 부패 제거와 더불어 교사의 사회적·경제적 지위 향상과 교권의 확립을 주요한 목적으로 삼았다. 당시 교권은 교원의 교육권, 신분권, 생활권 등의 권익 수호를 의미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여파 속에서 결성된 전교조 역시 오랫동안 교사들의 권리 신장을 위한 운동을 벌여 왔다. 전교조 결성 자체가 교사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한 노력이었다. 합법화된 이후에도 조합원들을 위한 교권 상담이나 지원은 노조의 주된 활동 중 하나였다. 정부의 탄압에 맞서 노동기본권과 정치기본권 보장을 요구했고, 교육 당국과 학교장의 부당한 업무 지시와 교권 침해에 맞서 교사들의 권리를 옹호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교사 운동은 곧 ‘교권’을 신장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역대 정부는 교사들의 요구를 한사코 외면했다. 교사들의 권리 보장은 별 진척이 없었다.

그런데 2000년대 후반부터 전교조 운동의 초점이 변하기 시작했다. 진보 교육감 시대를 거치면서 투쟁을 자제하고 협상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기울었다. 국가 교육정책을 비판은 했지만, 정부에 맞서 진지하게 대중투쟁을 조직하기보다는 시·도교육청을 활용해 피해를 완화하는 전략을 선호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많은 조합원들이 학교 교육을 바꾸겠다며 교육청 관료나 공모제 교장으로 진출했다. 정부, 교육청, 그리고 관리자와 싸우면서 교권을 보호하려는 노력은 점차 그들과 협상하거나 그들에 기대어 교권을 보호하는 방식으로 대체됐다. 교권 침해 문제가 심각해질수록 전교조는 진보 교육감과 협력해 교권보호조례를 추진하는 데에 더 신경을 썼다.

교권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강화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2000년대 후반 ‘학생인권조례 제정 운동’이 벌어진 때부터다. 정부와 우파는 ‘학생인권조례’가 교권 추락을 가속화시킬 것이라며 핏대를 세웠다. 이들의 주장에는 교권이 학생들을 통제하는 권한이라는 정식과 교육활동을 원활하게 하려면 학생인권을 어느 정도 억압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다시 말해, 교권을 학생인권과 대치시킨 것이다.

전교조를 비롯한 교사들의 투쟁이 약화되는 것과 맞물려 우파의 주장은 더 기승을 부렸다. 전교조의 변화된 전략은 교권이 법령이나 제도상의 ‘교육활동 보호’ 개념으로 인식되는 데 한몫을 했다. 교권보호조례는 교권을 현행 법령의 테두리 안에 가뒀고, 교육청을 활용한 교권 보호는 교사의 권리가 아니라 교육활동 보호에 초점을 뒀다.

전교조는 교권과 학생인권을 대치시키는 것에 반대해 왔지만, 교육 당국에 기대어 교권을 보호한다는 전략은 교권을 협소화하는 프레임에 포섭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 때문에 교육 운동 진영에서는 부정적인 이미지의 ‘교권’이 아니라 교사의 ‘교육권’이라는 용어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교육권’ 개념에는 교사의 다른 중요한 권리들이 빠져 있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학생인권과 대치하는 협소한 교권 개념과 선을 긋고, 수업권이나 생활지도권을 넘어서 교육 과정 편성권, 교육 내용 선정권, 학생 평가권 등을 포괄하는 확장된 개념을 지향했다. 그러나 이것이 교권 개념을 대체하지는 못했다. 그 결과 ‘교육권’은 협소한 교권과 내용상 별반 차이가 없다고 인식되고 있다.

저들의 교권과 우리의 교권

지금 통용되는 협소한 교권 개념에는 약점이 있다. 교권을 교사의 ‘수업권’이나 ‘생활지도권’으로 한정해서 보면, 학생이나 학부모가 잠재적 가해자로 보일 수 있다. 역으로 학생의 입장에서 보면 교사는 잠재적인 학생인권 침해자로 보일 것이다. 교권 침해 문제를 표면적으로만 보고 구조적 문제와 연결해 보지 않으면 개인의 권리 대 권리의 충돌로 바라보게 된다. 학교 내 갈등을 교육 주체들 간의 권리가 서로 경합한 결과로 보면 결국 제로섬 게임이 된다. 정부는 이러한 프레임을 강요하며 교권 침해를 소위 문제아와 진상 학부모의 문제로 몰아가고 있다. 그들도 잘못된 구조의 피해자들인데 말이다.

그동안 교사들의 고통을 방치해 온 정부는 지금 ‘교권 수호자’ 행세를 하고 나섰다. 그러나 정부가 진정으로 우려하는 것은 교사들의 안전이 아니라 ‘교육경쟁력’이 약화되는 것이다. 정부가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교사도 학생도 아닌 수업이다. 윤석열 정부는 국가 경쟁력을 높인다며 강도 높은 ‘교육 개혁’을 예고하고 있다. 최근 교육부는 사교육을 잡겠다면서도 경쟁교육을 강화하려 한다. 이를 위해 학생과 교사를 더욱 통제하는 게 필요하다고 볼 것이다.

교육부는 문제투성이 대책을 던져 주고는 이제 ‘교권 보호’는 그만하면 됐으니, ‘가만히 있으라’ 한다. 교사는 단체행동이 금지돼 있으니 9월 4일 ‘공교육 멈춤의 날’도 안 되고, 연가·병가도 불법이라고 한다. 지금껏 늘 그래왔듯이, 교권을 학습권과 대치시키면서 말이다. 정부가 엄정 대응을 경고하고 나선 것은 집단행동을 통해 교사들이 자신감을 얻어 더 많은 권리와 대책을 요구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교육감들도 교사들의 복무 관리 및 단속에 나섰다. 일부 진보 교육감들이 ‘공교육 멈춤 행동’을 지지한다고 발표했지만, 이 교육청들도 교육부의 징계 협박 공문을 그대로 학교 현장으로 내려보냈다. 교육청은 그동안 학교 내 갈등을 수수방관해 왔고, 모든 책임을 교사 개인에게 떠넘겨 왔다. 이번에도 말로는 교사들 편에 서겠다고 했지만, 교사들의 집단행동을 엄호하지 않고 교육부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정부는 교사들에게 실질적인 권리를 줄 의사가 전혀 없다. 정부가 교사들의 권리 보장에 얼마나 인색한지를 보여 주기 위해 한 가지 사례를 더 들겠다.

2012년 서울에서는 광주에 이어 두 번째로 교권보호조례를 추진했다. 그해 5월에 시의회를 통과한 조례를 교과부는 재심의를 요구했고, 이후 재의결된 조례에 대해 집행정지와 무효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2014년 대법원의 판결로 조례는 수포로 돌아갔다. 교권보호조례를 좌절시킨 장본인은 당시 교과부 장관이었던 이주호다.

그가 조례를 문제 삼은 까닭은 “교육과정의 재구성이나 교재 선택 및 활용, 교수학습 및 학생평가에 대해 자율권”을 보장하는 조항이 교육 당국의 권한을 침해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결국 교사들에게 학생 통제 권한은 부여하지만 교육과정과 평가에 대한 권한은 못 주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조례안은 교권 침해자로 교육행정기관과 학교 관리자를 가장 앞에 뒀다. 민주적인 학교운영이나 교원인사관리, 교원업무경감, 비정규직 교원에 대한 동등한 처우 등 학교장의 여러 책무를 명시했다. 또한 학생의 학습권이 침해되지 않는 한 교원의 휴가, 휴직, 연수 등을 임의로 제한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이에 대해 교총과 교장협의회는 강력하게 반발하며 ‘교권보호조례 철회 운동’을 벌였다. 당시 교총은 논평을 통해 교권보호조례는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학생과 학부모에 의한 교권침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 사례에서 보듯이,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학교 관리자는 교권 문제에서 평교사와 이해관계가 같지 않다. 많은 교사가 관리자의 갑질, 부당한 업무 지시, 보복성 인사, 책임 전가 등으로 고통받고 있다. 최근 교사들의 증언에서도 나타났듯이, 관리자들은 학부모 민원이나 교권 침해 사건이 벌어지면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봐 교사에게 모든 책임을 미뤘다. 서이초 교사도 숨지기 전 학교에 여러 차례 업무 상담을 요청했지만 ‘전화번호를 바꾸라’는 권유만 있었고 모든 책임과 부담은 오롯이 혼자 짊어져야 했다.

물론 최근 교사 운동이 크게 벌어지면서 일부 교장이 교사 운동을 지지하기도 했다. 얼마 전 교사 집회에서는 교장 803명이 참가한 ‘교권보장과 교육공동체 회복을 바라는 교장들’ 성명이 발표됐다. 정부의 중징계 협박에도 소수의 학교 교장은 9월 4일 ‘공교육 멈춤의 날’에 재량휴업을 결정했다. 대규모 교사 운동의 여파 속에서, 소수의 의식 있고 용기 있는 교장들이 교사와 한목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교장 일반이 교사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것은 아니다.

노동계급인 교사들과는 달리 학교 관리자(교장·교감)는 중간계급이다. 교사는 학교에서 실질적 권한이 거의 없지만, 교장은 교육활동, 행정, 인사, 예산 등 학교 운영 전반에 대해 결정권을 갖고 있다. 교사들과 같은 공간에서 지내면서 아래로부터의 압력도 받지만, 그들은 주되게 교사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구실을 한다. 2019년 전교조 서울지부가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교사 3명 중 1명이 학교 관리자의 ‘갑질’을 경험했다. 독단적 의사 결정 및 부당 업무 지시(27.1퍼센트), 폭언·막말·뒷담화(17.2퍼센트) 등 적잖은 교사들이 관리자에 의한 교권 침해를 경험했다. 교장·교감은 일관되게 교사 편이 될 수 없다.

따라서 협소한 교권 보호에만 집중한다면 교권 침해의 진정한 원인을 가리고 잘못된 대책으로 미끄러지기 쉽다.

첫째, 진짜 교권 침해의 원인을 가린다. 교권이 보장되지 못하는 진짜 원인은 잘못된 교육 시스템이고 교권을 침해하는 주범은 정부와 교육청이다. 교권의 침해자가 학생과 학부모라는 생각은 교권에 관해서 교사가 관리자나 교육청과 이해관계가 다르지 않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생각은 교권 대책을 위해 정부나 교육당국에 기대는 경향으로 연결되기 쉽다.

둘째, 교사의 수업권과 교사의 다른 권리(노동·정치기본권, 교육과정과 평가에 대한 자율권, 학교 운영에 참여할 권리 등)가 별개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전교조를 비롯한 노조와 교원단체들은 교권과 교사의 노동조건 개선을 분리시키고 운동의 요구를 ‘교권 보호 대책’ 수립에 한정하고 있다.

셋째, 정부의 프레임에 도전하기 어렵다. 정부는 교권 보호를 ‘교육활동 보호’의 영역에 한정해 교권을 수업과 생활지도 과정에서 문제 학생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으로 규정한다. 정부는 교권 보호를 핑계로 학생과 학교 교육을 통제하는 것이 목적이다.

교사들에게는 어떤 권리가 필요한가?

지금 교사들은 모든 학생의 학습권 보장과 안전한 교육 환경 조성을 위해 ‘교사의 교육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교사의 교육권’ 개념에 한계와 모순이 있다고 하더라도, 교사들의 ‘교권 보호’ 요구가 보수적이라고 일축할 수는 없다. 정부가 말하는 ‘교권 보호’와 현장 교사들이 요구하는 ‘교권 보호’는 맥락이 다르다는 점을 봐야 한다.

지금 교사들이 교육권을 요구하는 것은 교육노동과정에 대한 통제권을 요구하는 것이다. 노동자는 안전한 노동 환경을 요구할 권리가 있고 작업통제권이 있어야 하듯이, 교사들은 자신의 안전뿐 아니라 모든 학생의 수업권 보장과 안전한 교육환경을 위해 ‘교권 보호’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학생 통제를 강화하려는 정부·우파와는 다르다. 국민의힘 원내대표 윤재옥은 지난 5월에 열린 ‘교육활동 보호 강화를 위한 제도 개선 방안 포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학교 질서의 근간인 교권을 지키고 교육공동체의 건전성을 위한 제도 개선은 국가적으로 매우 시급한 현안”이다. 이들은 교사들의 안전과 권리를 염려해서가 아니라 “학교 질서” 약화가 교육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까 걱정하는 것이다.

좌파 일각에서는 학교에서 여전히 교사는 갑이고 학생은 을이기 때문에, 교사 운동은 교권 보호가 아니라 학생인권을 더 강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학생인권을 일관되게 옹호하려는 취지는 좋지만, 이런 주장 또한 교사와 학생 사이를 “권력” 관계로만 보는 일면적 시각을 우파와 공유하며 교권과 학생인권을 대립적으로 보는 약점이 있다.

오늘날 교사들이 느끼는 교권 추락은 지난날 “교사로서 누려 왔던 부당한 권력의 상실(약화)” 같은 것이 아니다. 교사들이 ‘교권 보호’를 절실하게 요구하는 것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가혹한 교육 시스템 때문이다. 학교 시스템이 학생들에게 억압적이라고 해서 교사가 곧 학생인권의 침해자인 것은 아니다. 교사들 역시 그 시스템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사들의 생활지도권 보장은 필요하다. 회의를 원활하게 진행하려면 의장이 회의 참가자들을 통솔하고 진행을 방해하는 사람을 제지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야 하듯이,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에게도 문제 행동에 적절히 대처할 권한이 있어야 한다. 특히 학생의 방해가 교사나 다른 학생의 안전을 위협한다면 ‘수업 방해 학생 분리 조치’가 불가피할 수 있다. 물론 이때에도 학생의 인권과 학습권이 보장돼야 한다.

현재 교사들이 학생인권을 억압할 권리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교권 보호를 핑계로 학생 통제와 경쟁 교육을 강화하려는 정부 정책에 대해, 대다수 교사는 정부의 대책이 실효성이 없고 문제가 많다고 비판했다.

한편, 좌파 일각에서는 ‘교권 보장’이 아니라 ‘노동권 보장’을 요구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수업과 생활지도는 교사의 주요 직무다. 교사가 교육권 보장을 요구하는 것은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권을 노동권과 대립시키는 접근법보다는 교권이 노동권을 포함하도록 또는 연결되도록 주장하는 것이 좋다.

지금 운동의 핵심 요구는 ‘교육권 보장’에 집중돼 있지만, 전국에서 수십만 명의 교사가 집회에 참가하는 데에는 교사의 누적된 불만과 총체적 위기 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집회에서는 특히 20~30대 젊은 교사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들은 IMF 경제 위기 이후, 교사라는 직업의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부푼 꿈을 안고 힘든 입시 관문과 임용 문턱을 넘어 교직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들이 품었던 기대와 학교의 현실은 너무도 달랐다. 그들이 마주한 것은 교육활동에 전념하는 환경이 아니라 업무 폭탄과 열악한 노동조건이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학교가 아니라 갈등으로 얼룩진 학교였다. 이러한 조건에서 ‘교권 침해’는 가뜩이나 힘든 교사들에게 좌절감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교사가 수업과 생활지도에 전념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과중한 업무를 대폭 줄이고 학급 당 학생 수를 줄여야 한다. 이를 실현하려면 교원과 직원을 확충해야 한다. 교사가 학생들의 흥미와 요구에 맞춰 수업과 평가를 수행하려면 교육과정 편성, 교육 내용 선정, 평가 방식 등에서 폭넓은 권한을 갖고 있어야 한다. 학생인권과 학생 자치를 보장하려면, 평교사가 학교 운영에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학생의 학습권을 차별 없이 보장하려면 교육 복지를 확대해야 한다. 무엇보다 입시경쟁교육을 없애야, 학생들이 행복하고 안전한 학교에서 생활할 수 있다. 잘못된 정부 정책에 저항해 싸우려면, 교사들에게 파업권이 필요하다. 학생들에게 제대로 된 민주시민교육을 하려면, 교사에게도 정치기본권이 보장돼야 한다. 교사의 교육권은 교사의 다른 권리와 조건 개선 문제와 동떨어진 문제가 아니다.

또한,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교권은 사회적으로 확립된 개념도 아니고 투쟁을 통해서 확장하고 변화해 왔다.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 예컨대, 일부 교사는 교권 보호에 관해 교장이나 교육 당국과 교사의 이해관계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문제아를 찍어 내고, 악성 민원 학부모를 처벌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집단적 투쟁을 통해서 바뀔 수 있다. 실제로 교권 보호를 말하면서 연가도 못 쓰게 하고, 교사를 지키겠다면서 정작 교원 감축 등으로 교사를 공격하는 정부를 보면서 누가 교사의 권리를 부정하고 있는지 분명해졌고, 교사 운동은 대정부 투쟁 성격이 점점 더 강해졌다.

교권을 체계적으로 침해하는 자본주의 학교

오늘날 교사들은 과중한 업무, 과도한 책임, 학교 구성원과의 갈등으로 고통받고, 고립감과 무력감 때문에 힘들어한다. 교사가 겪는 육체적·정신적 고통은 자본주의 교육 시스템과 그 속에서 교사가 경험하는 노동 소외에서 비롯한다.

자본주의에서 교육은 이윤 생산(자본 축적)에 필요한 노동력을 양산한다. 다시 말해, 생산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한 교육받은 노동자를 공급하는 것이다. 한편, 지배자들에게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착취에 순응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지식과 기술을 익히는 것뿐 아니라 성격과 태도, 가치관 형성도 중요하다. 따라서 열심히 일하고 말 잘 듣는 노동자를 기르기 위해 학교는 인성교육, 기본생활습관 형성을 강조한다. 학교생활기록부에는 교과 성적뿐 아니라 인성이나 행동 특성을 중요하게 다룬다.

자본주의 학교는 미래의 노동력을 위계화된 노동시장에 배치하는 구실을 한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 학교는 경쟁과 차별이 만연하고, 시험 제도를 통해 학생들은 경쟁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실패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게 된다.

자본주의에서 교육은 경쟁력 있는 노동력을 공급하고 계급 관계와 지배 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에 자본가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국가는 교육을 국가 통제하에 두고 싶어 한다. 정부는 학생들이 무엇을 배우는지를 국가수준 교육과정과 검인정 교과서 등을 통해서 통제한다. 그리고 국가수준평가(수능)를 통해서 가치 있는 지식, 보편적인 지식을 규정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학생들과 교사들이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학교는 교장을 정점으로 하는 위계적인 관료조직으로 구성돼 있고 그 속에서 학생인권과 학생 자치, 교사들의 권리는 억압된다.

한국뿐 아니라 다른 많은 나라의 교사들도 다른 부문의 노동자들에 비해 노동·정치 기본권 등 권리 제약을 받고 있다. 각국의 정부가 교사들의 권리를 억압하는 것은 교육이 자본주의에서 하는 구실 때문이다.

자본주의 국가는 지배계급의 필요에 따라 교육에 투자를 하기는 하지만, 이윤이 우선이기 때문에 교육에 최소한의 비용을 들이려 애쓴다. 때문에 각국의 교사들은 인력 부족과 과중한 업무에 시달린다. 또한 자본주의 국가는 경제 위기에 직면하면 교육 예산과 복지를 삭감하고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경쟁 교육을 더욱 강화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생산물이나 과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를 소외라고 불렀다.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은 오늘날 교사들의 처지를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자본주의 학교는 인간의 전면적 발달이 아니라 노동시장에 팔려나갈 미래의 노동력을 만드는 곳이다.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자신이 취득한 성적, 졸업장(학위), 자격증 따위를 위계화된 노동시장의 직업과 교환하게 된다. 교사는 미래의 노동력을 길러내는 노동자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가능한 모든 인간 노동의 산물을 상품으로 만들었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교육의 상품화는 교사의 노동과 교사·학생·학부모의 관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교육의 상품화는 교육적 관계를 물신화된 상품 관계로 만든다. 교사와 학생·학부모는 교육활동에서 상호 소통하고 협력하는 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교육 서비스의 공급자와 소비자의 관계로 마주한다.

교사는 교육이 자본주의 시스템에 종속돼 있고, 교육이 상품화된 현실에서 심한 노동의 소외를 경험한다. 교사는 상대적으로 높은 지식과 기능을 가진 (소위 전문직) 노동자로 다른 부문의 노동자들에 비해 소외가 덜하리라는 생각들도 있지만,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교육에 대한 국가 통제와 경쟁 교육이 강화되었고 그에 따라 교사는 점점 더 자신의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 특히 신자유주의 교육개혁으로 교사 노동의 소외가 심화했다.

교사는 학생을 가르치는 과정 즉 자신의 노동과정에서 거의 통제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교육과정 편성, 수업 내용과 방식, 평가 등 일련의 교육 업무에서 자율성이나 창의성을 발휘하기 어렵다. 소위 ‘교사의 전문성’은 주어진 교육과정의 틀 안에서 정해진 교과 내용을 얼마나 더 효과적으로 가르치느냐 즉 수업 전문성에 한정될 뿐, 여기에 교육학이나 심리학 등 교육에 필요한 일반적인(총체적인) 지식은 요구되지 않는다. 교사는 학생을 가르치고 평가하는 기계처럼 취급된다.

신자유주의 교육개혁은 말로는 교사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강조했지만, 현실은 정반대의 결과로 나타났다. 교육과정과 평가 등 모든 업무가 표준화되고 중앙집권적 통제가 강화됐다. 그 결과 교사의 일이 보다 관례화되고 탈기술화되며, 학생 및 학습에 관한 전문적인 판단과 이의 실행에 필요한 교사의 자율성은 더욱 줄어들었다.

그 결과 교사는 권한은 없고 책임만 넘치는 존재가 되었다. 증대된 학교의 자율성은 대부분 교장의 권한으로 집중됐다. 교사는 거대하고 잔혹한 자본주의 교육 시스템의 부품으로 소모된다.

학교 수업은 입시 성적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만 가치를 인정받는다. 학교는 가르치고 배우는 일보다 성적 매기기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교사 노동의 산물은 인간의 발달(학생의 성장)이 아니라 성적이다. 교사와 학생은 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성적으로 매개되는 사물화된 관계다. 교사는 학생들의 점수, 등급, 자격을 평가하지만, 그 평가 시스템에 자신도 구속당한다. 시험을 치고 성적으로 점수와 등급을 매기는 과정은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교육의 시장화·상품화가 진행되면서, 교사의 지식 공급자로서의 지위(권위)가 흔들렸다. 이제 교사는 유일한 또는 주된 지식의 원천이 아니다. 공교육의 위상이 떨어지면서 교사의 권위도 함께 추락했는데, 입시경쟁 교육의 강화와 사교육 증가는 교사의 권위 추락을 가속했다. 학교(교사)가 제공하는 교육 서비스가 다른 상품과 비교·평가됐다. 교육수요자들의 필요와 요구에 발 빠르게 부응하는 사교육과 달리 공교육은 경쟁력이 떨어지고 시대에 뒤처진다고 비판을 받았다. 공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는 무능력한 존재로 평가받았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노동자끼리도 일자리, 월급, 승진 등을 놓고 경쟁하도록 만든다. 신자유주의 교육개혁의 핵심 중 하나는 교사 책무성 정책이다. 차등 성과급과 교원평가는 교사들 간의 경쟁을 심화시켰다. 교사들 간의 유대감이 약화하고 단절과 고립감이 커졌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교사들 사이에서는 업무 폭탄 돌리기 현상이 나타났다. 학교에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업무 분배를 놓고 교직원 사이에 갈등이 심해졌다. 고용 형태나 직종에 따른 차별도 교사들의 연대를 방해한다.

이렇듯 교사들은 학교에서 자신들의 노동 과정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처해 무력감을 느낀다. 이런 상태에서 학생 또는 학부모에 의한 교권 침해(특히 언어 또는 신체적 폭력)는 교사에게 절망감을 안겨 준다.

학생과 학부모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은 현재 교사의 위기 상황뿐 아니라 학생들의 소위 문제 행동이 증가하는 이유, 학교 공동체 내 갈등이 심화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노동자들이 생산과정을 통제하지 못해 소외를 겪듯이,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어떻게 배울지에 대해, 자신의 학교생활에 대해 거의 통제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모든 교육과정과 수업은 정해진 채로 학생들에게 강제된다. 학교 수업이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도 없어 학습 동기가 생기지 않는다. 노동자들이 임금을 받기 위해 참고 일하듯, 학생들도 지식과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적과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졸업장이나 자격을 얻으려고 공부한다.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듯, 많은 학생이 과도한 학습시간과 부담, 그리고 성적 스트레스와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린다. 학습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수업이 어려워 이해할 수도 없는 학생들에게 하루 종일 교실에 앉아 있는 것은 그야말로 고역이다.

더군다나 치열한 입시 경쟁은 학생 간의 관계를 단절하고 학생의 자존감과 인격을 파괴한다. 경쟁 시스템은 승자와 패자를 가르고 우열과 서열을 매기며 패자를 낙인 찍고 배제한다. 경쟁에서 진 사람은 지배당해도 좋은 사람, 쓸모없는 인간, 배제된 인간으로 취급당한다. 경쟁주의 교육은 친구를 협력하고 배려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이기기 위해 짓밟아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학교 생활 적응’의 심리학적 정의는 이렇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접하게 되는 여러 가지 교육적 환경을 자신의 욕구에 맞게 변화시키거나 자신이 학교생활의 모든 상황과 환경에 바람직하게 수용되는 것.” 하지만 학생은 자신의 교육적 환경에 통제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많은 학생은 성적 때문에 차별받고 뒤틀린 교우관계로 인해 배제된다는 느낌을 일상적으로 받는다. 학생이 경험하는 소외는 불안, 우울, 낮은 자존감, 게임 중독, 자해나 자살 충동, 타인에 대한 폭력적 충동 등 개인의 내적 장애와 더불어 사회적 장애를 유발한다. 최근에 위기 가정이 늘어나고 아동의 양육 환경이 나빠지면서 정서행동 위기 학생(정서·심리적 이유로 학교 생활에 어려움을 겪거나 행동 문제를 보이는 학생)이 크게 늘어났다.

학생들은 학교 부적응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한다. 수업 참여를 소극적으로 거부하거나 적극적으로 수업을 방해하기도 한다. 교사의 ‘지시’나 학교 ‘규칙’을 따르지 않으려 하기도 한다.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하는 학생도 있고, 다른 학생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거짓 자존감을 얻으려는 학생도 있다. 자해나 자살 같은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한다.

교권 침해는 학생의 이런 부적응 행동이 교사와의 갈등으로 비화하는 하나의 “돌출점”일 뿐이다. 학생들에게 학교는 여전히 억압적이고 폭력적이다. 일부 학생에게 교사는 구조적 폭력을 자신에게 강요하는 사람으로 비칠 수 있다. 교사는 수업 참여를 요구하는 “정당한 지시”를 했지만, 어떤 학생은 그것을 폭력이나 강요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 학생은 교사를 하나의 인간으로 보지 않고 부당한 ‘권력’으로 생각해 인간적으로 함부로 대해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게 된다. 학생은 자신에게는 없는 ‘권력’을 대신해 신체 폭력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론적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왜 현실에서는 교사의 교육권과 학생인권이 충돌하는 것처럼 보일까? 자본주의 학교 시스템에서 교사는 학생을 통제해야 한다는 압력을 크게 받는다. 학교의 주된 일이 학생들을 줄 세우고 등급 매기고, 체제에 순응하도록 길들이는 것이므로, 교사는 성적 경쟁을 강요하고 규율을 부과하는 역할을 떠맡게 된다. 한편 학교에서 경쟁과 차별, 억압과 소외를 경험하는 학생들은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 때로는 왜곡된 방식으로 저항한다. 이런 과정에서 학교 부적응, 학교폭력, 교권 침해 등 소위 ‘문제 행동’이 나타나게 되며, 이것이 학생과 교사 간 갈등의 근본 배경이다. 자본주의 학교에서 소위 ‘교권’과 ‘학생인권’은 둘 다 구조적으로 억압되면서 그 구조적 한계 안에서 서로 부딪히기도 하는 것이다.

교육에 시장 논리가 적용되면서 교육 당국은 학부모를 교육수요자로서 강조해 왔다. 교육소비자로서 학부모는 교사를 자녀 교육을 위해 협력해야 할 동료가 아니라 자신(과 자녀)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공급자로 보게 된다. 학부모는 식당이나 상점에서 주문을 하듯 자신이 원하는 서비스를 요구하고, 교사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질을 평가하고 불만족에 대한 항의나 서비스 개선을 요구하기도 한다.

입시경쟁교육, 학교폭력, 교육 불평등, 사교육비 증가 등으로 학부모들은 공교육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크다. 이런 환경에서 자녀가 학교에서 불이익을 받거나 혹 잘못될까 봐 학부모는 불안하다. 특히 학교폭력, 학생 징계, 내신 성적, 생활기록부 등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것이 입시경쟁을 포함한 자녀 진로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부모는 어떻게든 자기 의사를 관철하려고 민원과 고소·고발 등 교사를 압박하는 강력한 수단들을 이용한다.

교육적 관계의 단절은 사소한 불만을 증폭시키는 효과를 낸다. 학부모는 학교에 의견을 개진할 적절한 방식을 찾기 어렵다. 학교운영위원이나 학부모회 임원이 아니라면 학교장이나 교사들과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다. 말만 교육의 주체이지, 학부모 대다수가 학교 운영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더군다나 학부모는 학교 구성원이 아니다 보니 학교에 대한 신뢰를 갖기 더 어렵고 자녀의 이야기에만 의존하다 보니 교사에 대해 오해하기도 쉽다. 한편, 학교 내 갈등이 갈수록 심각해 지면서 ‘학교의 사법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것이 교육 주체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되레 갈등을 키우고 교육적 관계를 악화시킨다.

근본적 사회 변화

교권 위기의 핵심은 교육적 관계의 왜곡과 단절 즉 교육공동체의 해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교사의 고통을 완화하려면 학교 내 갈등을 줄여야 한다. 그러려면 교사의 교육권 보장을 넘어 교원 확충, 학급당 학생 수 감축, 입시경쟁 완화 등 교사의 조건과 환경 개선이 반드시 필요하다. 경제 위기에 직면해 정부가 긴축을 추진하고 경쟁 교육을 강화하는 상황에서 정부로부터 양보를 얻어내려면 만만찮은 투쟁이 필요하다.

한편, 이러한 개선책들이 문제를 완화할 수는 있겠지만, 교사·학생이 겪는 소외나 학교 구성원들간의 갈등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런 문제들은 자본주의 학교 교육의 본질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많은 교사가 ‘학생의 학습권’과 ‘교사의 교육권’이 보장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자본주의 학교는 학생의 학습권과 교사의 교육권을 제대로 보장할 수 없다. 자본주의 학교는 학생을 특정한 분야의 노동력으로 기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인간의 전면적 발달을 체계적으로 억압하고, 교사에게는 이러한 노동을 강제하려고, 교사의 교육권을 아주 낮은 수준으로 제한한다.

학교 구성원들의 갈등 문제를 해결하려면 교사, 학생, 학부모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재정립하고 상호 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학교 공동체를 구축해야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학교 시스템하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경쟁 시스템이 학교 구성원 간의 관계를 왜곡하고 인격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학교는 점점 더 교육이 불가능한 곳이 되어 가고 있다. 와해된 교육적 관계는 교육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교수-학습 과정은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 협력적 상호작용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교육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경쟁 교육을 강화한다. 그러나 경쟁 교육이 강화할수록 학교 공동체는 더 불안해지고 그만큼 교육은 더욱 힘들어진다. 악순환이다.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은 학교 공동체 내 갈등의 근본 원인을 설명해 주면서 동시에 갈등을 해결하는 근본 대책도 알려준다. 오직 급진적이고 실천적인 대안 — 진정한 사회주의적 전환 — 만이 소외를 근절할 수 있다.

러시아 혁명기 교육 실험은 진정한 사회주의에서 교육이 얼마나 진보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지 힐끗 보여주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변화 중 하나는 학생과 교사의 관계가 재정립되고 학교가 민주적인 교육공동체로 거듭나는 과정이다. 사회주의 노동학교에서 민주주의와 자치가 꽃을 피웠다. ‘학교 공동체’는 ‘교장’을 선출·소환할 수 있었고, 학교 정책을 집행하는 집행위원회를 선출했다. 중요한 결정은 교사, 학생, 직원 등 학교 구성원 전체가 참가하는 집회를 통해서 이뤄졌다. 학교 소비에트에서 교사, 학생, 직원은 모두 동등한 발언권을 가졌다. 학생들은 스스로 자신의 공동체를 조직하고 관리했다. 학교에 규칙과 규제가 최소화됐고, 학생들은 진정한 자치를 누렸다. 교사는 더는 학생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험과 성적이 폐지되면서 억압하고 통제할 이유도 사라졌다. 교사는 지도자도 상급자도 아닌 학생에게 조력자나 나이 많은 동지로 인식됐다. 학부모는 특정 자녀의 개별 학부모로서가 아니라 단체를 조직하고 대표들을 선출해 학교 소비에트에 참가했다. 이를 통해 학부모는 교직원, 학생, 지역 노동자 등과 함께 학교 운영에 공동으로 참여하고 학생들의 발달을 위해 협력하는 역할로 자리매김했다. 학교는 구성원들의 우애와 연대에 기반한 생활공동체로 거듭났다.

교육과정, 수업, 평가가 모두 확 바뀌었다. 교육과정은 주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과목을 연계하여 종합적으로 구성했고, 교육과 노동을 결합해 학생의 삶과 배움을 연결하려 했다. 또한 지역 또는 학교마다 각각의 조건과 상황에 맞게 교육과정을 자율적이고 창의적으로 구성했다. 수업은 학생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주도하는 방향으로 프로젝트 학습 등 당시로서는 아주 혁신적인 방식을 권장했다. 평가는 시험과 성적으로부터 자유로운 조건에서 학생들의 독립적이고 자발적인 참여를 기반으로 진정으로 교수학습과정에 도움이 되는 방식을 지향했다.

위대한 마르크스주의 심리학자인 비고츠키는 인간의식 발달의 원천을 사회적 관계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발달의 동력을 협력과 자유의지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사회적 관계를 착취와 억압으로 왜곡시킨다. 협력과 자유의지가 아니라 경쟁과 소외가 만연해 있다. 자본주의 교육은 인간 발달을 체계적으로 제약하고 억압한다.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생산력 발전에 질곡이 되듯, 자본주의적 학교교육은 인간의 잠재력을 발달시키는 데 걸림돌이 된다. 모든 인간을 자유롭고 전면적으로 발달시키는 교육은 경쟁과 착취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와 결코 양립할 수 없다.

생산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가 어떠한가, 누가 사회를 운영하는가, 교육이 사회에서 어떠한 구실을 하는가가 학교 교육을 규정한다. 러시아 혁명기에 놀라울 정도로 민주적인 학교가 가능했던 것은 사회 체제가 근본적으로 바뀌면서 교육의 목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착취와 억압의 뿌리가 사라지고 노동자들이 집단적이고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사회에서, 교육의 목적이 더는 자본 축적을 위한 노동력 양산이 아니라 ‘인간의 전면적 발달’과 ‘사회를 집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주체’를 양성하는 것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학교가 자본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날 때야 비로소 교사의 소외도, 학생의 소외도 끝장 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참담한 교육 현실이 바뀌기를 바란다. 교사·학생이 모두 행복한 학교, 평화롭고 안전한 학교, 자유롭게 가르치고 배우는 학교를 진심으로 갈구한다. 러시아 혁명기 교육 실험이 힐끗 보여주었듯이, 완전히 새로운 학교는 가능하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를 그대로 둔 채 교육정책이나 제도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새로운 생산양식의 토대 위에, 새로운 사회적 관계가 형성될 때만이 가능하다. 따라서 교육을 바꾸려는 투쟁은 반자본주의적 전망 속에서 사회 체제를 바꾸려는 투쟁과 연결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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