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1930년대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훨씬 확연해졌다.
지난주 토요일 암살 미수 사건 덕에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우익에게 거의 신적인 존재가 됐다.
지도자들이 앞다퉈 트럼프의 쾌유를 빌었다. 아르헨티나 극우 대통령 하비에르 밀레이는 “좌파의 폭력”에 분개하는 장문의 게시글을 ‘엑스’(옛 트위터)에 공유했다.
프랑스 파시스트 마린 르펜은 트럼프 암살 기도를 두고 “우리의 민주주의를 해치는 폭력의 극적인 상징”이라고 했다.
브라질 전 대통령 자이르 보우소나루는 이렇게 말했다. “현시대 최고의 세계 지도자에게 우리의 지지를 보낸다.”
전 세계 극우·파시스트들은 이 체제가 낳은 고통을 이용하고 사람들의 분노를 엉뚱한 데로 돌린다. 그들은 스스로를 현 체제와 단절한 세력이라고 거짓 포장한다.
끔찍한 일이지만, 그들이 승리하는 미래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1930년대가 파시즘의 시대였던 것만은 아니다. 대중 투쟁들이 있었고, 매우 다른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던 전환점들도 있었다.
올바른 교훈을 끌어내야 한다. 중도 정치인들을 지지해서는 극우·파시스트를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이다.
1930년대에 이런 전략은 민중전선이라는 형태를 띠었다. 민중전선은 사회주의자들이 친(親)자본주의 정치인들과 맺은 선거 연합이었다.
그 전략은 극우를 저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미국에서든 프랑스에서든 많은 좌파가 민중전선 전략을 되살리고자 한다.
실천에서 그런 전략은 좌파가 노동계급 사람들에게 지난 30년 동안 그들의 생활 수준을 공격한 정치인들에게 투표하라고 호소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극우의 성장을 부추기는 친기업적·인종차별적 정책들을 지속시키고, 극우에게 “권력층 반대” 세력을 자처할 기회를 준다.
이런 전략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분위기를 바꿀 인종차별 반대 운동을 거리·일터·캠퍼스에서 건설해야 한다.
절망의 정치에 맞선다는 것은 희망의 정치를 건설한다는 뜻이다.
이 체제가 사람들에게 가하는 고통은 극우의 자양분이 되고 극우의 부상을 초래한다. 이런 체제를 분쇄할 사회적 격변이 없다면 극우의 위협은 계속 되살아날 것이다.
우리에게는 선거가 아니라 투쟁이 근본적 사회 변화의 동력임을 이해하는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가 필요하다.
독일 마르크스주의자 발터 베냐민은 1930년대에 이렇게 말했다. “혁명은 인류가 타고 가는 기차의 비상 브레이크를 잡아당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우리의 긴급한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