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왜 두 국가 방안은 해법이 될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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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곳곳에서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이 전례 없는 규모로 벌어지고 있다. 시위 참가자들이 가장 많이 외치는 구호는 “프리 프리 팔레스타인”
국제적인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은 미국 등 서방 정부들을 압박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 조 바이든은 이스라엘 규탄을 유대인 배척이라고 비난하는 한편, 운동을 진정시키려고 ‘두 국가’ 방안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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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무장관 앤터니 블링컨도 최근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마무드 아바스를 만나 이렇게 약속했다.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에 대한 팔레스타인 주민의 정당한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겠다.”
안타깝게도,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 안에서도 두 국가 방안이 그나마 실현 가능한 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에 필요한 전망은 무엇인지, “팔레스타인 독립” 구호에 어떤 정치적 내용을 담을 것인지 하는 문제가 매우 중요하다.
두 국가 방안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전의 경계를 따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각자의 국가를 세워 공존하자는 안이다.
그러나 두 국가 방안은 오슬로 협정
팔레스타인해방기구
2000년에 당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 중재해 이스라엘 총리 에후드 바라크와 PLO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가 캠프 데이비드
이 협상에서 이스라엘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요구에 일절 양보하지 않았기 때문에 캠프 데이비드 협상은 결렬됐다.
캠프 데이비드 협상은 이스라엘 국가가 팔레스타인의 독립 국가 수립을 인정할 의향이 전혀 없음을 재확인시켜 줬다.
시온주의자들은 역사적 팔레스타인 영토 전부를 이스라엘 땅의 일부로 여기고 그곳에 유대인만의 배타적 민족 국가를 세우려 해 온 것이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두 국가 방안을 원하지 않는다
1947년 11월에 채택된 유엔 결의안 181호의 내용은 팔레스타인을 분할하는 것이었다
시온주의 운동은 미국과 옛 소련 등 제국주의 국가들의 후원을 받아 인종차별적 이스라엘 국가를 창건했다.
이스라엘 초대 총리 벤구리온은 “후대가 치를 역사적 실수”라고 못마땅해 했지만, 유엔 결의안은 이스라엘에 훨씬 유리했다.
인구로 보나 소유지 규모로 보나 아랍인에 비해 훨씬 적었던 유대인에게 전체 면적의 57퍼센트를 분할했다. 게다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비옥한 땅과 해안 도시를 유대인이 차지했다.
그럼에도 새 이스라엘 국가하에서조차 팔레스타인인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점이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문젯거리였다. 그래서 이스라엘 군대는 1948년 초부터 “강제 이주,” 즉 인종 청소를 벌였다.
사실 팔레스타인인 “이주”는 시온주의 전략의 핵심이었다. 때로는 아랍 군주들의 동의를 얻는 “자발적” 이주의 형태를 띠기도 했지만 대체로 “강제” 이주였다. 벤구리온은 이미 1938년 5월에 “나는 강제 이주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1948년 나크바
이스라엘은 나크바를 통해 팔레스타인 땅의 80퍼센트를 차지했다. 나머지 20퍼센트가 지금의 서안지구인데, 요르단
이스라엘 내에 남은 팔레스타인인들은 1966년까지 계엄령 통치를 받았고, 오늘날에도 기껏해야 이등 시민 취급을 당한다.
시온주의 무장 세력이 나크바를 벌일 때, 당시 소련 독재자 스탈린은 이를 지지했다. 이스라엘을 중동의 동맹국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소련의 당시 위성국 체코슬로바키아는 시온주의 무장 세력인 하가나에 중요한 무기들을 공급했다. 하가나는 이스라엘 방위군의 핵심이 됐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진정한 전략적 위상은 이내 분명해졌다. 석유가 매장돼 있는 중동에서 서방 제국주의의 이익을 수호하는 무장한 요새였던 것이다.
1967년 6월 ‘6일 전쟁’은 이스라엘의 구실을 분명하게 각인시켜 줬다. 이스라엘 군대가 서안지구, 가자지구, 동예루살렘, 골란고원
미국과 영국이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가 주도한 아랍 민족주의 운동을 견제하기 위해 항공모함을 동원해 이스라엘군의 공습을 지원한 덕분이었다.
미 국무부는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단번에 승리했다”고 만족감을 표했다.
이런 역사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미국도 1967년 이전의 국경선에 근거한 두 국가 방안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렵잖게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은 1982년 시나이반도에서 철수했지만, 서안지구와 예루살렘, 골란고원을 계속 점령했다. 1948년 국경선은 시온주의 지도자들에게 불만족스러운 타협이었기 때문이다.
극우 시온주의자들의 “대
칼라시니코프와 올리브 나뭇가지
지금은 오슬로 협정의 기만성이 널리 폭로되지 않았던 1993년이 아니다. 지난 30년 동안 PLO 지도부의 타협이 모든 전선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에 악영향을 미친 것을 우리는 목격했다.
팔레스타인 독립 운동은 1930년대 영국 식민주의에 맞서 싸울 때부터 유대인과 아랍인,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이 함께 사는 세속적이고 민주적인 단일 국가 창건을 지향했다.
1970년대 초반까지 PLO 지도부는 한 손에 칼라시니코프 소총을 쥐고 다른 한 손에 올리브 나뭇가지를 들고 팔레스타인 독립 투쟁을 벌였다. 아라파트는 1974년 유엔 총회 연설에서 “나는 항상 올리브 나뭇가지와 총을 갖고 다닌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 뒤 PLO 지도부는 두 국가 방안을 수용하는 실리주의 노선으로 후퇴했다. 마침내 1988년 아라파트는 무장 투쟁 포기 선언을 했다.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하면 언젠가 “정상적인” 팔레스타인 국가가 수립될 것이라는 어렴풋한 약속
그러나 PLO가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하고 서방 제국주의와 화해하는 길로 들어선 결과는 무엇인가?
오슬로 협정 체결로부터 30년이 지난 뒤 서안지구의 유대인 정착자 수는 70만 명에 이르고, 그들이 팔레스타인인의 땅을 계속 빼앗으면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완전히 무기력해졌다.
이렇듯 이스라엘 국가는 아파르트헤이트 국가이므로 과거에도 팔레스타인인들과 공생할 수 없었고 지금도 공생할 수 없다.
이스라엘 국가는 세속적이고 민주적인 단일 국가로 대체돼야 한다. 그럴 때 “요르단강에서 지중해까지, 팔레스타인 독립!”을 이룰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이스라엘과 그 국가와 협력하는 부패한 아랍 정권들을 전복하기 위한 아랍 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