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팔레스타인 연대 대학생 운동:
1960~70년대 미국의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서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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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미국 대학생들의 캠퍼스 점거 현장에는 “학살자 조”라고 쓰여 있는 포스터들이 붙어 있다. 가자지구의 인종 학살을 지지하는 바이든을 학살자라고 규탄하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60년 전인 1965년에도 그 비슷한 슬로건이 미국에서 등장했다. 미군의 베트남 폭격에 반대하는 첫 대규모 시위에서 시위대는 “이봐 존슨, 오늘은 아이들을 몇 명이나 죽였나?” 하고 외쳤다.
린든 비 존슨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바이든처럼 민주당 소속 대통령이었다. 그는 1965년에 베트남 전쟁의 확대를 승인했다.
미국은 이미 그 몇 년 전부터 베트남에 개입하고 있었다. 중국(1949년)에 이어 아시아에서 또 하나의 민족 해방 혁명이 승리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남베트남의 부패하고 억압적인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무기와 돈을 제공하고 군사 고문단을 상주시켰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남베트남 군대가 민족해방전선(NLF)의 게릴라들에게 패배하기 시작했다. 존슨의 보좌관 맥조지 번디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새로운 조처가 없다면 … 1~2년 안에 … [남베트남의] 패배는 필연적인 것처럼 보인다.”
존슨은 첫 번째 확전을 명령했다. 베트남 전역에 전쟁 사상 최대 규모의 폭격을 가했다. 해병대 등 전투 부대를 파견했다. 4월 말 베트남 주둔 미군의 수는 3만 3500명이었는데, 그해 말에는 21만 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남베트남에서 벌어진 싸움은 15년 전의 한국전쟁과는 매우 달랐다. 한국전쟁 때는 중국과 북한 지배자들이 통제할 수 있는 정규군을 상대로 한 전투였다. 그러나 남베트남의 전투는 억압적인 정권에 항거하는 민중의 자발적인 투쟁을 상대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미국 정부는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소모전에 빠져들었다.
흑인 평등권 운동과 반전 운동의 만남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 확대는 광범한 대학생들의 반발을 샀다. 그때까지 반전 시위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수백 명 수준이었다. 1963년 남베트남 독재자 고딘디엠의 처제이자 악명 높은 경찰청장의 처인 누(Nuh)가 미국을 여행했을 때, 컬럼비아대학교와 위스콘신대학교에서 각각 200여 명이 반대 시위를 벌였다. 1년 뒤 뉴욕에서 열린 최초의 반전 시위에는 600여 명이 참가했다.
그러나 전쟁이 확대된 1965년 봄 ‘민주 사회를 위한 학생들’(SDS)이 주최한 시위에는 무려 2만여 명이 참가했다.
많은 대학교들에서 수천 명이 연좌 농성 등 반전 운동을 벌였다. 5월 21~22일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에서 36시간 동안 열린 ‘학내 정치 토론회’(teach-in)에는 학생 3만 5000명이 참가했다.
전쟁의 역학이 반전 운동의 규모를 키웠다. 1967년 미국 정부는 베트남 주둔 미군을 증강하기 위해 징병을 늘렸다. 그러자 전에는 징집을 피할 수 있었던 많은 대학생들이 이제 더는 그럴 수 없게 됐다. 전쟁은 단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실존의 문제가 됐다.
1967년 4월 뉴욕에서 40만 명이 반전 시위를 벌였다. 10월에는 약 10만 명이 수도 워싱턴에서 시위를 벌였고, 그중 3만여 명이 무장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는 국방부 건물로 행진했다. ‘비폭력’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800명 넘게 체포됐다.
1967년 시위는 운동의 전환점이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운동의 지배적인 슬로건은 베트남의 평화였다. 이제 시위대는 별이 새겨진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붉은 깃발을 들고 경찰과 맞붙었다. 국내에서 미국 제국주의와 전투를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급진화의 기원은 1950년대부터 전개돼 온 흑인 평등권 운동에 있었다. 1966년 프로 권투 헤비급 세계 챔피언 무함마드 알리가 베트남전 징집을 거부하면서 흑인 평등권 운동이 반전 운동과 만나게 됐다.
알리는 이렇게 말했다. “보시오. 난 그들 베트콩[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싸울 일 없소. 베트콩은 절대로 날 깜둥이라고 안 불렀소.” 알리의 챔피언 타이틀은 박탈됐고 선수 생활도 4년 동안 중단됐다.
그 이듬해 이번에는 흑인 운동의 지도자이자 상징적인 인물인 마틴 루서 킹 목사가 공개적으로 전쟁을 반대했다.
그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백악관에 “진보적” 대통령이 있기 때문에 전쟁을 반대하지 말라는 온갖 종류의 압력이 마틴 루서 킹에게 가해졌다. 그 자신도 그전까지 어떻게든 비폭력적인 중간적 길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마침내 마틴 루서 킹은 미국 흑인들이 자신을 이등 시민 취급하는 국가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워야 하는 것은 “잔인한 역설”이라고 말했다. “해마다 국방에 쓰는 돈이 사회적 개선을 위해 쓰는 돈보다 더 많은 이 국가는 영적인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징집자 중에는 흑인·노동자·빈민의 비율이 월등히 높았다. 베트남 파병 미군 250만 명 중 약 80퍼센트가 그들이었다. 전쟁 초기 미군 전사자의 20퍼센트가 흑인이었다. 미국 전체 인구 중 흑인 비율이 10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사율은 2배에 달한 것이다. 그만큼 더 많은 흑인이 더 위험한 작전에 투입됐다는 뜻이다.
존슨은 베트남 전쟁을 확대한 반면 자신의 대선 공약들(“위대한 사회”)을 배신했다. 그 때문에 많은 운동 단체들이 급진화됐다. ‘민주 사회를 위한 학생들’(SDS)이 가장 대표적인 예였다. ‘민주 사회를 위한 학생들’은 1964년 존슨의 대선 운동을 열렬하게 지지했었다. 그러나 1967년 ‘민주 사회를 위한 학생들’은 혁명적 좌파 경향이 태동하는 환경이 됐다.
1968년
1968년은 반전 운동이 성장하고 있음을 뚜렷하게 보여 준 해였다. 그해는 미국 제국주의의 충격과 함께 시작됐다. 베트남의 설(뗏)인 1월 31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남베트남 주요 도시 36곳을 공격했다.
수많은 미국인들이 텔레비전을 통해 사이공 주재 미국 대사관 건물 안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를 경악한 채 지켜봤다.
50만 명의 미군 병력은 가공할 화력으로 뗏 공세를 결국 물리쳤다. 그러나 뗏 공세는 남베트남 정권이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고 미국의 군사 지원이 없다면 자국 영토를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여지없이 보여 줬다.
또, 베트남 상황이 통제되고 있고 어디로 파병되든지 간에 “우리의 아들들”(미군 병사들)은 돌아올 것이라는 존슨의 설득은 실패했다.
4월 미국 지배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건들이 벌어졌다. 4월 4일 마틴 루서 킹이 테네시 주 멤피스에서 암살당하자 미국 전역의 흑인 게토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와 전쟁에 대한 분노가 결합됐다.
아이비리그 대학의 하나인 컬럼비아대학교에서 혁명가들이 주도한 점거 농성이 벌어졌다.
이 분출의 여파는 8월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로 이어졌다.
베트남 전쟁에서 실패하고 대규모 반전 운동에 시달린 끝에 존슨은 전당대회 직전에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비교적 최근에 반전 입장으로 돌아선 청년들은 반전 입장을 표방한 유진 매카시를 지지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존슨이 지명한 휴버트 험프리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수천 명의 시위대가 대회장 밖에서 며칠 동안 경찰과 맞붙으며 시위를 벌였다. 경찰의 잔인무도한 시위 진압이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됐다.
그 일주일 전에 소련군 탱크가 “프라하의 봄”을 분쇄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다. 미국 정치인들은 소련을 비난했지만, 시카고 거리에서 미국 국가도 소련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평화주의자로서 반전 시위를 하기 위해 시카고에 온 청년들이 시카고를 떠날 때는 혁명적 정치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미국에서 1968년은 흑표범당과 ‘닷지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의 공장들에서 일한 흑인 노동자들이 주도했다) 같은 혁명적 조직들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해였다.
1969년에는 그 전해 3월 16일 남베트남 미라이에서 미군이 벌인 민간인 대량 학살 장면이 공개되면서 공분이 일었다. 1969년 10월 15일 200만 명이 미국 전역에서 동시다발로 반전 시위를 벌였다.
상처 입은 야수
전쟁을 끝내는 것이 전쟁을 시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울 수 있다. 베트남을 포기하면 미국의 제국주의가 타격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슨의 후임인 공화당 소속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1970년 4월 캄보디아 침공을 명령했다. 확전을 하면 북베트남이 미국의 조건을 수용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라고 계산한 것이다.
이에 분노한 대학생들이 수백 개의 대학교에서 반전 집회를 열었다. 5월 4일 오하이오 주 켄트주립대학교에서 주 방위군이 시위 학생들에게 총격을 가해 4명이 숨졌다.
피살 소식을 들은 학생들이 350개 대학교에서 동맹 휴업을 했다. 또, 5월 9~10일 전국에서 열린 시위들에 대학생 약 400만 명(전체 대학생의 60퍼센트)이 참가했다.
주 방위군이 대학교 16곳에 개입했고, 잭슨 칼리지에서는 흑인 학생 두 명이 살해됐다.
켄트 참사 5일 뒤 워싱턴에서 10만 명이 행진했다. 닉슨의 연설문 비서관 레이 프라이스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도시는 무장한 야영지였다. 폭도들이 창문을 깨고 타이어를 펑크 내고 주차된 차량을 탈취하고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그것은 소위 ‘학생 시위’라고 불렸다. 그러나 학생 시위가 아니라 내전이었다.”
인기 없는 전쟁을 수행하는 군대 내에서도 반전 정서가 확산됐다. 베트남뿐 아니라 전 세계 미군 기지에서 병사들이 저항하기 시작했다. 곳곳의 미군 기지의 병사 그룹들이 만든 반전(反戰) 지하 신문은 200여 개였다. 신문 제호 중에는 “우라질 군대”(Fuck the Army) 같은 것도 있었다.
탈영이 늘었고, 지휘관을 겨냥한 수류탄 투척이 장교들에게 악몽이 됐다. 병사들의 장교 공격은 1969년 126건이었고 1971년에는 425건으로 늘었다. 전투 참가를 거부하거나 기피하는 병사들의 명령 불복종이 만연해졌다.
권력자들은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닉슨의 보좌관들은 그들이 권좌에 올랐을 때 외국에서 벌어지는 전쟁에만 대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이 전쟁을 반대하는 반란에 직면했고, 아마도 국내의 혁명에 대처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뉴욕 타임스〉)
미국 정부는 1973년 1월 북베트남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 강도 높게 하노이를 폭격했다.
2년 뒤인 1975년 4월 30일 미국은 사이공 주재 대사관을 포기하고 미국 시민, 남베트남 주민, 외국인 7000명 이상을 헬리콥터로 대피시켰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 제국주의의 첫 패배였다. 2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어가면서도 굴복하지 않은 베트남 농민·청년들의 영웅적 투쟁과, 미국 전역을 휩쓸고 서방 세계 전체로 확산된 거대한 반전 운동이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 더 읽을 거리
《세계를 뒤흔든 1968》(크리스 하먼 지음, 책갈피) 중 ‘미국: 전쟁의 귀환’과 ‘상처 입은 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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