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기본 입장 해설 14:
혁명이 국제적이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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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볼셰비키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은 1918년에 이렇게 말했다.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패망할 것이 자명하다.”
그보다 한 해 전 볼셰비키가 이끄는 러시아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 혁명의 모든 지도자들은 혁명이 확산돼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었다.
혁명 전 러시아는 전반적으로 산업 발전 수준이 낮았다. 그리고 제1차세계대전과 신생 노동자 국가를 상대로 한 몇 년간의 내전 때문에 그나마 있던 산업마저 대부분 파괴됐다.
내전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20년까지 14개 국가의 군대가 구체제 장성들이 이끄는 반혁명 세력의 편에서 러시아를 침공했다.
전쟁으로 공장과 교통망이 파괴됐다. 농작물이 불타고 약탈당했다. 500만 명이 사망했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잔혹한 전쟁은 혁명을 건설한 세력을 사실상 압살했다. 1917년 혁명이 일어났을 때에도 소수였던 러시아 노동계급은 전쟁이 끝나고 그 수가 1914년의 43퍼센트로 줄었다.
러시아는 적대적 자본주의 국가들의 바다에 둘러싸인 사회주의의 섬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볼셰비키와 살아남은 노동자·빈농의 영웅적 노력으로 러시아가 자본주의로 회귀하는 것을 얼마간 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제국주의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혁명을 목 졸라 죽일 터였다.
희망은 다른 곳에서도 혁명이 일어나는 데에 있었다. 예컨대 독일 노동자들이 러시아 노동자들처럼 자국 지배자를 타도하고 권력을 장악한다면 새로운 기회가 열릴 터였다.
혁명의 확산은 러시아 노동계급의 물질적 여건을 개선하고 다른 나라로 반란을 확산시키는 가교 구실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노동자 국가들이 자본주의적 경쟁과 국경 없이 협력하는 세상의 토대를 놓았을 것이다.
그런 전망은 그저 공상이 아니었다. 1919~1923년에 독일 노동자들이 혁명을 일으켰다. 1919~1920년에 이탈리아에서는 핵심 부문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했다.
그러나 당시 독일과 이탈리아에는 노동계급과 그 동맹들 내 가장 선진적 부위를 결집시키고 이끌 볼셰비키 같은 혁명적 당이 없었다.
사병 반란
독일에서는 육·해군 사병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노동자들이 사회를 운영할 노동자 평의회를 세웠다. 그러나 그 사병 반란과 노동자 평의회는 개혁주의 세력의 전술·전략을 능가하지 못했고 이후 분쇄됐다.
1920년 9월 이탈리아에서는 제조업 기업주들이 노동자 파업에 직장 폐쇄로 맞서자 노동자 50만 명이 공장을 점거하고 노동자 통제를 선포했다.
토리노시(市)에서는 노동자들의 공장 점거가 이원 권력의 요소들을 발전시켰다. 노동계급 민주주의가 기존 정부 권력에 맞서고 무장한 노동자들이 공장을 지켰다.
그러나 통제력은 여전히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손에 있었다. 이들을 대체할 혁명적 지도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공장 점거와 농민들의 토지 점거를 끝내 버렸다.
백척간두에 서 있던 자본주의는 기사회생해 혁명적 물결을 맞받아쳤다.
자본주의하에서는 생산이 세계적으로 조직된다는 특성 때문에 제국주의가 개발도상국·빈국의 자원을 수탈하게 된다.
이 체제는 전 세계 노동자들을 착취·억압하고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들을 특히 가혹하게 쥐어짠다.
자본주의의 강압적 권력은 일국 수준에서 시작돼 확산하는 국제 혁명으로 타도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주의의 강압적 권력이 더 나은 형태의 사회를 만들려는 일체의 시도를 교살할 것이다.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가 말했듯, “사회주의의 건설은 전국적·국제적 규모로 벌어지는 계급투쟁이라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
혁명이 확산되지 않는 상황에서 볼셰비키당은 갈림길에 놓였다. 한 쪽은 암울한 상황을 버텨 내면서 다른 곳의 노동계급 항쟁을 지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길이었다.
다른 쪽은 러시아 노동자·빈농을 초착취해 서방과 경쟁하는 길이었다. 바로 이 길이 스탈린주의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이 글은 본지의 기본 입장을 해설하는 기획 연재의 열네 번째 글이다. 다음 연재에서는 스탈린과 국가자본주의의 부상에 관해 다룰 것이다.